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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문시장이 샤넬 정품 똑같이 만들 순 있지만 입어보면 감이 안 산다”2013-03-13 23:54:43
작성자 Level 10


‘대구발 오트 쿠튀르’의 신지평을 열고 있는 앙디올 패션디자이너 김건이씨가
현대백화점 대구점 4층 매장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대구 패션산업 부활’을 외치고 있다.
 

패션(FASHION)은 ‘패션(PASSION)’. 대한민국 시골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성이 옷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치자. 이후 그녀가 파리·밀라노·뉴욕·런던·도쿄 컬렉션에서 주목받을 확률은? 제로다. 이 바닥은 노력만으로는 안된다. 노력보다 한 차원 웅혼한 힘이 필요하다. 바로 ‘열정’이다. 그것도 1~2년으로는 어렵다. 족히 20년 이상 담금질해야 세계 무대에 겨우 턱걸이할 수 있다. 대구 출신의 세계적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1994년 10월 파리 컬렉션에서 저고리를 벗긴 채 한복치마만으로 웨딩드레스라인을 끌어내 당시 프랑스 르몽드지 패션기자 로랑스 베나임으로부터 ‘바람의 옷’으로 대서특필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무명초’에 불과했다.

열정은 경계를 넘는다. 열정은 전략과 계획도 무력화시킨다. 열정은 고정관념을 밀어낸다. 그리하여 상투성과 매너리즘까지 불가항력으로 만들어버린다. 열정이 바닥나면 상상력의 세계가 죽는다. 결국 창작욕이 사라진다. 작품은 상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대구의 패션문화.

고(故) 김선자를 비롯 최복호, 박동준, 변상일 등이 지역 패션 1세대를 풍미했다. 2세대가 나타나야 될 시점에 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워낙 다양한 옷이 무차별로 쏟아지다보니 톱 브랜드도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프로추어 시대가 도래했다. 2000년대부터 공룡처럼 비대해져가는 인터넷 숍, 홈쇼핑이 옷시장을 폭식하고 있다. 백화점에서도 새로운 감각, 새로운 패션 마케팅을 요구한다.

지난 8월 개점 1주년을 맞은 현대백화점 대구점(이하 현대백).

여성의류 매장의 한 브랜드가 주목을 받았다. 바로 ‘앙디올(ENDEHOR)’이다. 그 브랜드를 론칭한 패션 디자이너 김건이는 ‘대구 패션계의 젊은피’로 부상하고 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다. 기자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가 유명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뭔가를 감지하고 있다. 국내와 해외의 경계에서 대구 패션의 미래를 가늠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녀를 현대백 4층에 있는 매장에서 만났다.

1㎜의 차이가 고급-저급 구분지어
형식 100% 베껴도 룩은 모방 못해

디자이너 지망생 옷부터 잘 만들겠단 생각 버려야
단추구멍 넓이와 옷 전체의 함수부터 아는 게 더 중요

그간 디자이너들 몸매에 끌려다녀…
패턴이 몸매를 리드할 수 있어야

앙디올의 스타일은 첫 3초이미지 중시
고객 내면의 美까지 고급스럽게 끌어내야

유명 브랜드에 혹하는 세태 슬퍼…
작품같은 맞춤옷 전성시대 열고싶다


◆ 백화점은 꿈도 꾸지 않았다

- 현대백 입성기가 궁금하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닌데.
“그동안 백화점 수수료 매장 진입은 상상도 안했다. 자본력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백이 신규 브랜드 발굴과 지역 브랜드 육성을 목적으로 지역의 젊은 디자이너들에 주목, 8개 디자이너 브랜드의 편집숍을 구성해 4층 가장 좋은 자리를 내 주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자신이 없어 망설였는데 나름 브랜드 인지도 제고를 위한 좋은 기회라 여겨 큰맘 먹고 입성했다.”

- 앙디올이 지역에선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은 것 같은데.
“맞다. 백화점 입점으로 인해 앙디올이란 브랜드가 거대 유통시장에서 성장가능성을 인정 받았다는 게 가장 뿌듯하다.”
(그녀는 주 2회 정도 현대점 매장에 나온다. 대부분은 대백프라자 근처에 있는 본점에 진을 치고 있다. 그녀의 옷은 현재 뉴욕과 홍콩의 4개 매장에서도 팔리고 있다.)

- 지금 대구의 맞춤옷 시장은 갈수록 좁아들고 그 빈틈을 유명 수입브랜드가 독식하고 있는 것 같다.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젊은이들도 유명 브랜드에 혹한다. 하지만 나는 기성복과 거리를 두고 나 혼자만이라도 작품 같은 맞춤옷 전성시대를 만들어 갈거다.”

- 겉 보기에 현모양처 스타일 같은데, 드세기 이를데 없는 패션계에 뛰어들었다.
“1988년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하면서부터 패션과 인연을 맺었다. 의상학과에 진학하자 어머니가 미싱을 선물로 사줬던 게 발단이 된 것 같다. 국제복장학원을 함께 병행해 다닌 덕에 학교 앞에서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잘한 것부터 만들었다. 대학 동아리방의 커튼은 물론 연극 동아리의 무대의상까지 직접 만들어 줬다. 새로운 모티브가 있으면 빨리 달려가, 보고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악착같은 성격이 패션과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진 것 같다.”

- 첫 매장은 언제 냈는가.
“99년에 가든호텔 근처 봉덕동 패션거리 한 켠에 앙디올이란 간판을 올렸다. 원래 앙디올은 발레용어다. 몸을 회전하면서 한 쪽 다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는 동작을 의미한다. 20~30대를 겨냥,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의상을 추구했다. 그러면서도 핸드 메이드적 터치를 많이 삽입시켰다. 말하자면 프레타 포르테(기성복)적인 게 아니고 손으로 직접 만드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적인 것이다.”

◆ 하루 단 한 장의 옷도 못 팔기도 했다

- 애송이 옷이라 할 수 있는데 좀 팔렸는가.
“한달간 매장에서 지나가는 사람구경만 했다. 가끔 지인이 인사치레로 팔아 주는 게 다였다. 참담했다. 하루에 한 벌도 못파는 날이 수두룩했다.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전을 걷으려고 했다. 그때 남편이 ‘망해도 괜찮다’며 힘을 팍 실어줬다. 그 말이 나를 지탱시킨 것 같고 거기서 인내의 미덕을 배운 것 같다.”

- 해외 첫 패션쇼 진출기가 궁금하다.
“해외 첫 패션쇼는 2005년 싱가포르 싱엑스에서 열렸던 아시아패션위크에서였다. 처음 참가했던 해외전시이기도 했고 더군다나 패션쇼까지 하자니 말이 아니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짧은 영어로 모델에게 헤어이미지를 전달했건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맘에 들지 않아 직접 스프레이를 들고 다니며 헤어를 고친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해외시장 진출은 더 많은 노력과 시장조사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2005년부터 해외시장에 눈을 돌렸다. 간이 좀 부었다. 2009년 9월 파리 후즈 넥스트 전시에 참가하여 그해 말부터 처음 해외시장에 앙디올의 완제품 의류들을 수출하게 되었다.

- 국내 첫 패션쇼는 어떻게 진입했나.
“2003년 프리뷰 인 대구 바이어 쇼가 국내에서 저의 첫 컬렉션이었다. 이후 전국연극제 초청 패션쇼, 2004년엔 영 제너레이션 라이프 스타일 쇼를 거쳐 대구 패션 페어 컬렉션, 대구 컬렉션 등에 지속적으로 참가했다. 사실 모든 디자이너들이 그러하겠지만 쇼를 준비하는 몇 달 동안은 한껏 예민해져 있기도 하지만 쇼가 끝나고 단골고객들로부터 소위 찜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동안의 피로도 말끔히 가신다.”


2012 F/W시즌을 겨냥, 앙디올이 내놓은 울 캐시미어를 소재로 한 7부 소매 코트(왼쪽)와 울과 가죽을 소재로 패치워크(조그마한 천을 잇대 커다란 천을 만드는 수예의 한 기법)한 패팅코트.


◆ 나는 핸드 메이드적 터치를 추구한다

- 라인이 너무 차분한 것 같다.
”나도 학창시절에는 꽤 초현실적이었다. 한때 릭 오웬스나 마르탱 마르지엘라 같은 해체적 라인, 헬무트 랭, 질 샌더 같은 직선적인 라인에 완전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오스카 드 라렌타의 쿠튀르적인 요소를 좋아했다.”

- 앙디올이 추구하는 스타일이 궁금하다.
“‘3초의 이미지’를 중시한다. 처음 봤을 때 ‘아, 이것’이란 탄성을 지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게 너무 현란해도 너무 밋밋해도 어렵다. 고요하면서도 폭풍스럽고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것이 심금을 흔든다. 그러려면 남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 고급스러운 색감에서 한발 더 나가야 된다. 겉만 포장하는 게 아니라 고객이 가진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고급스럽게 표출시켜야 한다. 나는 섬유미학에서 벗어나 회화미를 주시했다. 입체회화를 추구하는 손봉퇴 등 지역의 다양한 화가의 이미지도 놓치지 않았다. 양가죽도 즐기는 소재인데 그냥 밋밋하게 요철 문양을 주는 데서 탈피한다. 3D 입체 문양을 올리거나 초경량 천을 덧대 입체미를 극대화시켜도 본다. “

- 요즘 한국적 이미지를 많이 차용하는데.
“2010년부터는 한국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중시한다. 그걸 이용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패브릭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언젠가 이태리 바이어가 신윤복의 전모를 쓴 여인과 군접도가 결합된 패브릭을 보고 그림의 제목은 모르지만 한국의 유명한 화가인 신윤복의 작품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때 한국인으로써 넘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 이미지를 벤치마킹하려는 디자이너가 더 많아질 것 같다. 서양적인 모던한 라인에 동양적인 색채와 프린트를 입힘으로써 동서양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낸 라인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구매가 이루어지는 걸 보며 자신감을 많이 얻는다.”


◆ 요즘 입체패턴에 푹 빠져있다

- 입체 패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
”디자이너들이 몸매에 끌려다녔다. 패턴이 몸매를 리드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신체의 단점을 감싸줄 수 있는 앙드레김 옷 같은 풍성한 느낌, 직선과 곡선이 교차하고 그러면서도 어깨 부위를 부풀리고, 그러면서도 치마의 끝단은 좁게 하고, 멀리서 보면 풍부하면서도 심플하고 그러면서도 쉬 체형을 감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모티브를 착상해내는 게 너무 괴롭다. 어떤 패턴은 한달 이상 끄는 것도 있다. 현재까지 나름 인정받은 입체 패턴은 50여가지가 있다. ”

-해외 패션쇼는 비용도 상당할 것 같다.
”후즈넥스트에서 열리는 패션쇼는 말 그대로 바잉쇼라 큰 비용부담이 없지만 파리에서 컬렉션 한번 하는 데는 억단위의 비용이 든다.”

- 지역에서 다양한 천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가.
”대다수 대량 수출을 하는 천 공장에서는 우리와 같은 소규모 디자이너와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래를 꺼린다. 그래서 여러 군데를 돌며 천을 구해야 하는 게 힘들다.” -서문시장 패션도 우린 폄훼한다. 개인적으로는 세계적이라고 보는데. ”거기 관계자들의 실력은 인정해야 되는데 감각은 아직 아쉬움이 많다. 실용성이 강조되던 시절은 끝났다. 탁월한 감각이 품격을 좌우한다. 가령 샤넬 정품을 주면 서문시장 실력 정도면 그대로 만들어 낸다. 하지만 입어보면 감이 좀처럼 살지 않는다. 거장의 세계에서는 1㎜ 차이가 고급과 저급을 갈라놓는다. 다른 데서 승부가 나는 게 아니고 그 1㎜에서 판가름난다. 우린 1㎜를 우습게 여긴다. 형식은 100% 베껴도 그 룩(Look)은 좀처럼 모방할 수 없다.”

- 지역 대학의 섬유패션 학과 졸업생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패션학과를 졸업한다고 해서 모두가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옷부터 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단추 구멍의 넓이와 수, 색깔이 전체 옷과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가를 빨리 아는 게 더 실력파가 될 수 있다. 큰 게 아니라 작고 디테일한 데 성공의 씨앗이 있다. 그래서 능력보다는 성실이 우선이라 믿는다.”


◆ ‘앙디올’의 김건이 패션디자이너

1999년 남구 봉덕동에 첫 패션숍을 낸다. 2004년 일본 비틀(Beetle)에 소개됐고 2005년 싱가포르 싱엑스를 계기로 해외시장 구축에 나선다. 그녀가 론칭한 ‘앙디올’은 점차 고령화되고 있는 지역 디자이너의 뒤를 이을 차세대 브랜드로 꼽힌다. 특히 현대백화점 대구점이 오픈하면서 지역 브랜드 육성을 모토로 대구경북패션산업협동조합과 손을 잡고 키워낸 브랜드도 앙디올. 지역의 신진디자이너 8명과 함께 시작한 현대백화점의 편집숍 ‘ESTUDIO 200’에서 강준호, 김재우, 문보영 등 지역 신진 디자이너와 함께 출발한 그녀는 지난 1년간 시장의 엄격한 평가를 거쳐 현대백화점대구점에 단독 매장을 오픈한다. 현재 뉴욕과 홍콩에 쇼룸도 갖고 있다. 대구·경북패션협회 이사와 세계패션그룹한국지부(FGI) 회원인 그녀는 오는 28일~10월1일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지하 광장에서 오트 쿠튀르 작품 전시회를 갖는다.